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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도코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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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디아도코이 전쟁은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제국을 분할하려는 후계자들(디아도코이) 간의 권력 투쟁을 일컫는다. 알렉산드로스는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고 사망하여 혼란이 발생했고, 바빌론 회의를 통해 제국이 분할되었으나, 섭정 페르디카스의 권력 독점 시도로 인해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후 라미아 전쟁, 제1차, 제2차, 제3차, 제4차 디아도코이 전쟁을 거치며, 안티고노스,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리시마코스, 카산드로스 등 디아도코이 간의 세력 다툼이 격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마케도니아 왕가가 몰락하고, 안티고노스가 몰락하며, 셀레우코스가 리시마코스를 꺾는 코로페디온 전투를 마지막으로 헬레니즘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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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도코이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 이름디아도코이 전쟁
다른 이름포레모이 톤 디아도콘 (Πόλεμοι τῶν Διαδόχων, 그리스어)
Pólemoi tōn Diadóchōn (로마자 표기)
시기기원전 322년 – 기원전 281년 (41년)
장소그리스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아나톨리아
레반트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기원전 301년경 디아도코이 왕국들의 모습
기원전 301년경 디아도코이 왕국들의 모습
결과제1차 전쟁: 안티파트리스 왕조 승리
제2차 전쟁: 안티고노스 주도 연합군 승리
제3차 전쟁: 안티고노스 패배
바빌로니아 전쟁: 셀레우코스 승리
제4차 전쟁: 안티고노스 패배
교전 세력
제1차 전쟁 (기원전 321년–319년)승리측:
안티파트리스 왕조
안티고노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
패배측:
페르디카스 진영
제2차 전쟁 (기원전 318년–316년)승리측:
안티고노스 왕조
안티파트리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
뤼시마코스 (트라키아)
패배측:
폴리페르콘 진영
에피로스
제3차 전쟁 (기원전 315년–311년)공격측:
안티고노스 왕조
폴리페르콘
방어측: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
나바테아인
안티파트리스 (마케도니아)
뤼시마코스 (트라키아)
카리아
바빌로니아 전쟁 (기원전 311년–309년)공격측:
안티고노스 왕조
방어측:
셀레우코스 제국
제4차 전쟁 (기원전 307년–301년)공격측:
안티고노스 왕조
방어측: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
안티파트리스 (마케도니아)
뤼시마코스 (트라키아)
셀레우코스 (페르시아)
지휘관 및 지도자
제1차 전쟁 (기원전 321년–319년)안티파트리스 진영:
안티파트로스
크라테루스
네오프톨레모스
안티고노스
프톨레마이오스
페르디카스 진영:
페르디카스
안티게네스
셀레우코스
페이톤
에우메네스
제2차 전쟁 (기원전 318년–316년)안티고노스 진영:
안티고노스
데메트리오스
페이톤
셀레우코스
카산드로스
필리포스 3세
프톨레마이오스
뤼시마코스
폴리페르콘 진영:
폴리페르콘
에우메네스
페우케스타스
에우데모스
안티게네스
올림피아스
아이아키데스
제3차 전쟁 (기원전 315년–311년)안티고노스 진영:
안티고노스
데메트리오스
프톨레마이오스
아리스토데모스
폴리페르콘
프톨레마이오스 진영: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카산드로스
뤼시마코스
아산드로스
바빌로니아 전쟁 (기원전 311년–309년)안티고노스 진영:
안티고노스
데메트리오스
셀레우코스 진영:
셀레우코스
제4차 전쟁 (기원전 307년–301년)안티고노스 진영:
안티고노스
데메트리오스
퓌로스
프톨레마이오스 진영: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드로스
뤼시마코스
셀레우코스

2. 배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323년 6월 10일에 사망하면서, 그의 거대한 제국은 후계자 문제에 직면했다.[1] 알렉산드로스는 죽기 전에 명확한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고, 이는 권력 공백을 초래했다.

당시 후계자 후보로는 알렉산드로스의 이복형제인 필리포스 3세(정신 장애가 있었음), 그의 태어나지 않은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 그리고 사생아로 여겨지는 헤라클레스가 있었다.[1] 이러한 상황은 알렉산드로스의 전직 장군들 사이에 불화를 일으켜 계승 위기로 이어졌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멜레아그로스가 이끄는 필리포스 3세 지지 파벌과 페르디카스가 이끄는 알렉산드로스 4세 지지 파벌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필리포스 3세를 왕으로, 록사네의 아들(알렉산드로스 4세)을 공동 통치자로 하는 타협안에 동의했다. 페르디카스는 제국의 섭정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멜레아그로스와 반대파 지도자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페르디카스를 지지했던 장군들은 바빌론 분할을 통해 제국의 여러 지역을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집트를, 안티고노스 1세는 프뤼기아, 뤼키아, 팜필리아를, 리시마코스트라키아를 차지하는 등 각자 영토를 확보했다.

2. 1. 알렉산드로스 3세의 죽음

기원전 323년 6월, 알렉산더 대왕은 바빌론에서 후계자를 명확히 지정하지 않고 사망했다.[1] 그의 유언은 “가장 강한 자가 제국을 상속하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디아도코이 전쟁의 동기이자 최종 목표가 되었다.

당시 후계자 후보로는 왕비 록사네가 임신 중이던 아들과 첩실 바르시네가 낳은 서자 헤라클레스가 있었다. 그러나 록사네의 아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헤라클레스는 서자라는 한계가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이복형제인 필리포스 3세는 정신적 장애가 있었다.[1]

이러한 상황에서 마케도니아 귀족과 군인들은 바빌론 회의를 개최하여 대왕 사후 국가 체제를 논의했다. 회의 결과, 필리포스 3세와 록사네가 낳은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가 공동 통치자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필리포스 3세는 정신 장애가 있었고, 알렉산드로스 4세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실질적인 권력은 섭정인 페르디카스에게 집중되었다.

2. 2. 바빌론 회의

바빌론 회의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323년 6월 10일에 사망한 후, 후계자 문제와 제국의 통치 체제를 논의하기 위해 열렸다.[1]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명확한 후계자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장군들 사이에 권력 다툼을 야기했다.

회의에서 네아르코스헤라클레스를 왕으로 추대했지만 지지를 받지 못했다. 멜레아그로스는 대왕의 이복동생 아리다이오스를, 페르디카스록사네가 낳을 아이를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우메네스의 중재로 타협이 이루어져, 아리다이오스는 필리포스 3세로 즉위하고, 록사네가 아들을 낳으면 알렉산드로스 4세로 공동 통치자가 되기로 결정되었다. 페르디카스는 섭정으로서 제국의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지만, 멜레아그로스와 그 일파 300명을 처형하는 등 권력 기반은 불안정했다.

2. 3. 기원전 323년경 디아도코이의 세력 분포

기원전 323년 바빌론 분할 후 디아도코이들의 세력 분포


사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디오도로스의 사료를 중심으로 다른 사료와의 차이점을 서술한다. 디오도로스, 쿠르티오스 루포스, 유스티누스 세 사료 모두 인도, 박트리아 등 아시아의 먼 지역은 알렉산드로스 제국 시대의 지배자(사트라프)가 지배권을 유임 또는 상속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의 《역사총서[27]

인물영토
아산드로스카리아
안티고노스뤼키아 · 판필리아 · 프뤼기아
안티파트로스마케도니아 본국
에우메네스카파도키아 · 파플라고니아 (소아시아 북동부)
필로타스킬리키아
프톨레마이오스이집트
페이톤메디아
메난드로스뤼디아
무틸레네의 라오메돈시리아
리시마코스트라키아 및 그 주변
레온나토스헬레스폰토스 (소아시아 북서부)



; 쿠르티오스 루포스의 《알렉산더 대왕전》[28]



; 유니아누스 유스티누스의 《필리포스의 역사》[29]

3. 라미아 전쟁 (기원전 322년)

기원전 32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을 계기로 그리스 아테네 등지에서 반(反) 마케도니아를 내걸고 반란이 발발했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안티파트로스는 패배하여 테살리아 지방의 라미아에 농성했지만, 레온나토스가 소아시아에서 구원군을 이끌고 와 포위를 푸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레온나토스는 이 과정에서 전사했다. 안티파트로스는 소아시아에 있던 크라테로스에게도 도움을 청했고, 크라테로스는 중간에 아테네 함대를 격파하고 기원전 322년 크란논 전투에서 안티파트로스와 함께 그리스인들에게 승리했다. 이후 안티파트로스는 아테네에 입성하여 반 마케도니아 파를 숙청하고 추방했다. 이 전쟁은 안티파트로스가 농성한 도시의 지명을 따서 ‘라미아 전쟁’이라고 불렀다.

4. 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 (기원전 321년 ~ 기원전 319년)

페르디카스는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당초 안티파트로스의 딸 니케아와 약혼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자신의 딸이자 대왕의 여동생인 클레오파트라와의 결혼을 권유했다. 페르디카스는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여 마케도니아 왕위 계승권을 얻고자 니케아와 이혼하려 했고, 이에 안티파트로스는 분노했다. 페르디카스의 권력 강화에 위협을 느낀 크라테로스, 프톨레마이오스 등은 반(反) 페르디카스 동맹을 결성했다.

기원전 321년, 페르디카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공격하기 위해 이집트 원정을 시작했다. 그는 소아시아 원정에서 우호 관계였던 에우메네스에게 경계를 당부했다. 안티파트로스는 군대를 나누어 자신은 이집트로, 크라테로스는 소아시아로 보내 에우메네스를 공격하게 했다. 페르디카스는 이집트에서 나일강 도하에 실패하고 셀레우코스 등 부하 장군들에게 암살당했다. 이틀 후, 에우메네스는 소아시아에서 크라테로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디아도코이 전쟁; 에우메네스가 네오프톨레모스를 패배시키는 모습, 1878년 판화


페르디카스가 죽자, 마케도니아 체제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시리아의 트리파라디소스에서 다시 열렸다. 트리파라디소스 회의에서는 안티파트로스의 주도로 영토 재분배가 이루어졌고, 에우메네스 등 페르디카스 파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적으로 규정되었다. 이들을 토벌하는 책임은 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된 안티고노스가 맡았다.

트리파라디소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3]

인물역할 및 영토
안티파트로스제국의 섭정, 두 왕을 마케도니아로 이동
안티고노스아시아의 스트라테고스, 프리고아, 리키아, 팜필리아, 뤼카오니아 관할, 에우메네스 제거 임무
프톨레마이오스이집트 유지
리시마코스트라키아 유지
셀레우코스바빌로니아
페이톤메디아
안티게네스수시아나
아리다이오스헬레스폰티네 프리고아



사실상 안티파테르는 유럽을, 안티고노스는 동방의 스트라테고스로서 아시아를 장악하게 되었다.[3]

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은 페르디카스의 죽음으로 끝났지만, 에우메네스는 여전히 소아시아에서 활동 중이었다. 기원전 319년, 안티고노스는 오르키니아 전투에서 에우메네스를 격파하고, 크레토폴리스 전투에서 알케타스 등 연합군을 패배시켰다.

5. 제2차 디아도코이 전쟁 (기원전 318년 ~ 기원전 316년)

기원전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병으로 죽으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안티파트로스는 아들 카산드로스가 어리다는 이유로 마케도니아 왕의 후견인 역을 폴리페르콘에게 넘겼다. 이에 불만을 품은 카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 등과 함께 폴리페르콘에게 맞섰다. 폴리페르콘은 헬레스폰트에서 클레이토스가 이끄는 함대를 격파하는 등 초반에는 우세했지만, 아테네를 점령하려다 실패하고, 메갈로폴리스 공성전에서도 패배하면서 많은 병력과 명성을 잃고,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들도 잃고 후퇴했다.[7] 결국 폴리페르콘은 에피로스로 후퇴하여 유아 왕과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 올림피아스와 합세하여 마케도니아를 재침공했지만 암피폴리스에서 붙잡혔고, 필리포스 아르리다이오스 왕과 그의 아내는 모두 올림피아스의 사주를 받았다는 주장 하에 처형되거나 자살을 강요당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 열세에 몰린 폴리페르콘은 에우메네스를 지원하여 오르퀴니아 전투와 노라에서의 포위에서 벗어나게 한다. 에우메네스는 카파도키아에서 소규모 군대를 모아 폴리페르콘과 올림피아스 연합에 가담했고, 킬리키아의 왕실 금고에서 자금을 이용하여 용병을 모집하고, 아르기라스피데스(은방패)와 히파스피스트의 충성을 확보했다.[8]

5. 1. 안티고노스와 에우메네스 전투

안티고노스는 오르퀴니아 전투에서 에우메네스를 이기고 노라에 가두고 포위했다.[4] 이어서 기원전 319년 크레토폴리스 전투에서 페르디카스의 동생 알케타스를 죽게 만들었다.[4] 그러나 안티파트로스가 죽고 폴리페르콘에게 마케도니아 왕의 후견인 자리를 넘기자, 카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 등과 함께 폴리페르콘에게 대항했다. 폴리페르콘은 에우메네스를 지원하여 포위에서 벗어나게 했다.

에우메네스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군대를 정비하고 기원전 317년 파라에타케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와 싸웠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13] 이듬해 기원전 316년 가비에네 전투에서 에우메네스는 패했지만, 큰 타격은 아니었다.[14] 그러나 아군의 배신으로 안티고노스에게 넘겨져 처형당했다.[15]

에우메네스에게 승리한 안티고노스는 소아시아와 동쪽에 걸친 넓은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배신하려던 메디아 태수 페이톤을 제거하고, 유력한 디아도코이로 떠올랐다.

5. 2. 마케도니아 왕가의 몰락

대왕의 가족은 페르디카스가 죽은 후 안티파트로스에 의해 마케도니아 본국으로 돌아왔다. 안티파트로스의 사후 폴리페르콘카산드로스가 대립한 것은 언급한대로지만, 기원전 317년에 폴리페르콘이 펠로폰네소스반도로 원정을 떠나 자리를 비운 사이 필리포스 3세의 아내 에우리디케 2세쿠데타를 일으켜 카산드로스와 손을 잡았다.[4]

이에 대해 폴리페르콘과 동행했던 올림피아스가 마케도니아로 돌아가 쿠데타를 진압하고, 필리포스 3세에우리디케 2세와 그 일당들을 숙청했다. 그러나 폴리페르콘 파를 이긴 카산드로스가 펠로폰네소스에서 돌아오자 올림피아스는 고립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기원전 316년에 카산드로스에게 항복해서 처형당했다. 이에 따라 대왕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는 그 어머니 록사네와 함께 카산드로스의 보호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카산드로스는 유아 왕과 그의 어머니를 장악했다. 결국 카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며 제국의 유럽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6. 제3차 디아도코이 전쟁 (기원전 315년 ~ 기원전 311년)

기원전 314년, 동방의 디아도코이들은 안티고노스에게 영토와 보물을 나눌 것을 요구했지만, 안티고노스는 이를 거부하고 전쟁을 준비하라고 답변했다.[18] 이로써 안티고노스는 프톨레마이오스(셀레우코스가 그를 지원), 리시마코스, 카산드로스의 동맹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안티고노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지배하는 시리아와 페니키아를 침략하여 티레를 포위했다.[19] 한편, 카산드로스와 프톨레마이오스는 카리아의 사트라프 아산데르를 지원하여 안티고노스에 대항하게 했다. 안티고노스는 펠로폰네소스로 아리스토데무스를 보내 용병 군대를 모집하고,[20] 폴리페르콘과 동맹을 맺었으며, 그리스인들의 자유를 선포하여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조카 프톨레마이오스를 보내 소아시아 북서부를 확보하고 아산데르를 카리아에 몰아넣었다.

안티고노스는 직접 아산데르와 싸우기로 결정하고, 아들 데메트리오스에게 시리아와 페니키아를 맡겼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는 가자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에게 패배했다. 이후 셀레우코스는 바빌론을 장악하고 동쪽 태수령들을 확보했다. 안티고노스는 조카 텔레스포루스와 프톨레마이오스를 그리스로 보내 카산드로스와 싸우게 하고, 자신은 시리아/페니키아로 돌아가 프톨레마이오스를 몰아낸 뒤 데메트리오스를 동쪽으로 보내 셀레우코스를 견제하게 했다.

안티고노스는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 카산드로스와 평화 협정을 맺었지만, 셀레우코스와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기원전 310년, 안티고노스는 직접 동쪽으로 갔지만 셀레우코스를 물리치지 못하고 동쪽 태수령들을 포기해야 했다.

같은 시기, 카산드로스는 알렉산드로스 4세와 그의 어머니 록사네를 살해하여 아르게아드 왕조를 끝냈다.

6. 1. 안티고노스의 대두

소아시아에서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북부까지 지배했던 안티고노스는 그 세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다른 디아도코이와 대립하게 되었다. 기원전 315년 바빌론의 셀레우코스가 안티고노스를 두려워하여 이집트로 피신하면서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안티고노스는 그리스를 건너 배를 얻기 위해 시리아를 침공하여 프톨레마이오스와 전쟁을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카산드로스가 지배하는 그리스에 상륙하여 에게해의 섬과 펠로폰네소스반도의 대부분을 제압했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리아를 침공하여 가자 전투에서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의 군대를 물리쳤다.[16] 이 소식을 들은 안티고노스는 그리스에서 시리아로 이동하여 프톨레마이오스와 대치했다.

6. 2. 바빌로니아 전쟁 (기원전 311년 ~ 기원전 309년)

프톨레마이오스의 지원을 받은 셀레우코스가 바빌로니아에 복귀하자,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를 제외한 다른 디아도코이들과 강화하고 셀레우코스를 공격했다. (바빌로니아 전쟁) 그러나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 측의 니카노르를 티그리스강 강변에서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안티고노스의 바빌론 공격을 좌절시켰다.[16] 기원전 310년, 안티고노스는 직접 동쪽으로 갔지만 셀레우코스를 물리치지 못하고 (오히려 셀레우코스에게 패배하기도 함) 동쪽 사트라프들을 포기해야 했다.

6. 3. 마케도니아 왕가의 단절

카산드로스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생 테살로니케와 결혼했지만, 기원전 310년에 록사네와 알렉산더 4세를 암살했다. 이들은 모두 마케도니아 왕위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몰락했던 폴리페르콘안티고노스의 지원을 받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서자 헤라클레스와 함께 마케도니아로 진입하려 했다. 카산드로스는 폴리페르콘에게 뇌물을 주어 설득했고, 헤라클레스와 그의 어머니를 죽였다. 이로써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직계 자손은 모두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왕위 계승권을 가진 사람은 카산드로스만 남게 되었다.

7. 제4차 디아도코이 전쟁 (기원전 308년 ~ 기원전 301년)

프톨레마이오스는 에게해키프로스로 세력을 확장했고,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동부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동방을 순회했다. 안티고노스는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파견하여 그리스 지배권을 회복하려 했다. 기원전 307년 데메트리오스는 아테네를 점령하고 카산드로스의 총독 데메트리오스 오브 팔레론을 축출한 뒤 도시의 자유를 선포했다. 이후 데메트리오스는 키프로스를 침략하여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306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함대를 격파했다. 이 승리로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는 왕위에 올랐고,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리시마코스, 카산드로스도 뒤따라 왕을 칭했다.[21]

기원전 306년 안티고노스는 이집트 침략을 시도했지만 폭풍으로 실패했다.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는 로도스를 포위했지만(로도스 공성전),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 카산드로스의 지원군으로 인해 로도스인들과 타협해야 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구원자(소테르)"라는 칭호를 얻었지만, 데메트리오스는 그리스에서 카산드로스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304년 초, 카산드로스는 살라미스섬을 점령하고 아테네를 포위했다.[21] 데메트리오스는 보이오티아에 상륙하여 칼키스와 에레트리아를 해방시키고, 보이오티아 동맹 및 아이톨리아 동맹과 동맹을 갱신하여 아테네 포위를 풀고 카산드로스를 몰아냈다.[22] 기원전 303년 봄, 데메트리오스는 펠로폰네소스반도로 진격하여 시키온코린토스를 점령하고, 아르골리스, 아카이아, 아르카디아에서 전투를 벌여 펠로폰네소스 북부와 중부를 안티고니드 진영으로 편입시켰다.[23] 기원전 303~302년 데메트리오스는 코린토스 동맹을 결성하여 그리스 도시들을 "방어"했다.

카산드로스는 평화를 청했지만 안티고노스는 거절했고, 데메트리오스는 테살리아를 침략했다. 그러나 리시마코스아나톨리아를 침략하여 데메트리오스는 소아시아로 이동해야 했다. 기원전 301년 이프소스 전투에서 셀레우코스가 리시마코스를 지원하여 안티고노스는 전사하고 데메트리오스는 그리스로 도망쳤다. 리시마코스와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의 영토를 나누었고, 카산드로스의 형제 플레이스타르코스는 키리키아와 리키아를 차지했다.

기원전 301년경 이푸소스 전투 이후의 디아도코이 왕국들

7. 1. 안티고노스의 멸망

안티고노스셀레우코스와 대치하는 동안 프톨레마이오스키프로스에서 킬리키아(소아시아 남부)로, 심지어 그리스까지 진출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세력 확장에 불안을 느낀 안티고노스는 데메트리오스를 그리스에 파견했다. 데메트리오스의 군대는 기원전 306년에 〈살라미스 해전〉(키프로스 연안, 페르시아 전쟁과는 다른 위치)에서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승리했다. 이 패전으로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로 철수했다. 승전보를 받은 안티고노스는 자신을 마케도니아 왕이라고 선언하고, 데메트리오스를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21] 또한 안티고노스는 이집트를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듬해 왕위에 올랐음을 선언했다. 이에 카산드로스, 셀레우코스, 리시마코스도 연이어 왕을 칭했다.

기원전 305년에서 304년까지 발발한 〈로도스 공성전〉 이후 데메트리오스는 그리스에서 카산드로스를 상대로 승기를 잡았다. 기원전 302년에는 안티고노스가 그리스에서 자신을 맹주로 하는 헬라스 동맹을 결성했다. 궁지에 몰린 카산드로스는 강화를 요구했지만 안티고노스는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때문에 카산드로스는 프톨레마이오스와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그리고 셀레우코스 등에게 대 안티고노스 전선을 맺자고 호소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301년,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는 프리기아에서 이프소스 전투를 벌였으나, 이 전투에서 안티고노스가 전사하고 데메트리오스도 패주하는 등 대패를 당했다.[22][23]

이로써 안티고노스의 왕국은 승자들에 의해 분할되었고, 시리아, 바빌로니아, 이란 고원, 소아시아 동부를 지배하는 셀레우코스 왕조, 키프로스, 이집트(고대)를 지배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마케도니아 본국을 지배하는 안티파트로스 왕조, 트라키아와 소아시아 서부를 지배하는 리시마코스 왕조가 성립했다.

8. 마케도니아 쟁탈전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85년)

기원전 298년, 카산드로스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들인 안티파트로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5세는 무능함을 드러냈다. 알렉산드로스 5세는 형과 다툼을 벌인 후, 키프로스, 펠로폰네소스반도, 에게 해의 섬들을 장악하고 있던 데메트리오스 1세와 피로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카산드로스의 형제로부터 킬리키아리키아를 빠르게 빼앗았다.[12] 피로스는 암브라키아 국경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개입했고, 데메트리오스는 침공하여 알렉산드로스 5세를 살해하고 스스로 마케도니아의 지배권을 장악했다.(기원전 294년)[12]

데메트리오스가 그리스 본토의 지배권을 강화하는 동안, 그의 외곽 영토는 리시마코스(서부 아나톨리아를 회복함), 셀레우코스 1세(킬리키아 대부분을 점령함), 프톨레마이오스 1세(키프로스, 동부 킬리키아, 리키아를 회복함)에게 침략당하고 점령당했다.[12]

얼마 지나지 않아 데메트리오스는 리시마코스와 피로스의 동맹이 지원하는 반란으로 마케도니아에서 쫓겨났고, 그들은 왕국을 나누어 가졌다. 데메트리오스는 그리스를 그의 아들 안티고노스 2세에게 맡기고 기원전 287년에 동쪽으로 침공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기원전 286년에 셀레우코스에게 사로잡혔고, 2년 후 술에 취해 죽었다.[12]

9. 리시마코스 vs 셀레우코스 (기원전 285년 ~ 기원전 281년)

기원전 281년 코로페디온 전투에서 셀레우코스리시마코스를 패사시키고,[1]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는 이집트를 제외한 알렉산더 제국의 대부분을 세력 하에 두었다.[1] 그러나 이 전투 직후 셀레우코스는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한다.[1] 이로써 디아도코이의 첫 세대는 사라졌고, 전쟁은 또 하나의 단락을 맞이했다.[1]

기원전 282년 리시마쿠스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아르시노에 2세의 부탁으로 그의 아들 아가토클레스를 살해했다.[3] 아가토클레스의 미망인 뤼산드라는 셀레우코스에게 도망쳤고, 셀레우코스는 그의 아들 안티오쿠스를 아시아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한 후, 기원전 281년 리디아의 코루페디움 전투에서 리시마쿠스를 패배시키고 죽였다.[3] 셀레우코스는 리시마쿠스의 유럽 영토를 장악하기를 바랐고, 기원전 281년 트라키아에 도착한 직후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했는데, 그 이유는 아직 불분명하다.[3]

10. 헬레니즘 시대의 개막

기원전 281년 코르페디온 전투에서 셀레우코스가 뤼시마코스를 전사시키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는 이집트를 제외한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대부분을 자신의 세력 아래에 두었다. 그러나 이 전투 직후 셀레우코스는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했다.[1] 이로써 디아도코이 1세대는 멸망하고, 전쟁은 하나의 종지부를 맞이했다.[1]

리시마코스의 죽음으로 마케도니아 왕국의 다뉴브 강 국경이 야만인 침입에 취약해졌고, 곧 갈리아 부족들이 마케도니아그리스를 휩쓸고 아시아 소아시아까지 침략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누스는 침입자들에게 살해되었고, 몇 년간의 혼란 끝에 데메트리오스의 아들 안티고노스 고나타스가 마케도니아의 통치자로 등장했다. 아시아에서는 셀레우코스의 아들 안티오코스 1세도 켈트족 침입자들을 물리쳤고, 이들은 이후 그들이 거주했던 동부 프리고아의 중앙 아나톨리아에 정착하여 갈라티아로 알려지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으로부터 거의 50년이 지나서야 어느 정도 질서가 회복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이집트, 남부 시리아(코엘레 시리아로 알려짐), 아시아 소아시아 남부 해안의 여러 지역을 통치했다. 안티오코스는 제국의 아시아 지역을 통치했고, 마케도니아그리스(아이톨리아 동맹 제외)는 안티고노스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여러 나라의 전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마케도니아에서 퓌로스와 안티고노스 2세가 마케도니아 왕위를 놓고 싸웠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가 남부 시리아를 놓고 다투었으며, 기원전 261년의 클레오메네스 전쟁에서 안티고노스 왕조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싸운 것처럼 디아도코이의 후손들은 로마에 흡수될 때까지 전쟁을 계속했다.[1]

참조

[1] 서적 Antigonos the One-Eyed and the Creation of the Hellenistic State
[2] 논문 Bibliotheca Historica
[3] 논문 Bibliotheca Historica
[4] 논문 Bibliotheca Historica
[5] 논문 Bibliotheca Historica
[6] 논문 Bibliotheca Historica
[7] 논문 Bibliotheca Historica
[8] 논문 Bibliotheca Historica
[9] 논문 Bibliotheca Historica
[10] 논문 Bibliotheca Historica
[11] 논문 Bibliotheca Historica
[12] 논문 Bibliotheca Historica
[13] 논문 Bibliotheca Historica
[14] 논문 Bibliotheca Historica
[15] 논문 Bibliotheca Historica
[16] 서적 Antigonos the One-Eyed and the Creation of the Hellenistic State
[17] 논문 Bibliotheca Historica
[18] 논문 Bibliotheca Historica
[19] 논문 Bibliotheca Historica
[20] 서적 Antigonos the One-Eyed and the Creation of the Hellenistic State
[21] 논문 Dem.
[22] 서적 Antigonos the One-Eyed
[23] 논문 Bibliotheca Historica
[24] 논문 Historiae Alexandri Magni
[25] 논문 Historiae Philippicae
[26] 서적 지중해 세계사 京都大学学術出版会
[27] 논문 비블리오테카 히스토리카
[28] 논문 알렉산더 대왕전
[29] 논문 필리포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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